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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는 일

                                                                     

 

 

오민정의 이번 전시가 가진 타이틀은 ‘지켜보는 일’이다. 그는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시선을 부여한다. 작가가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자박자박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지켜본 것들을 드로잉과 영상으로 재현함으로써 관객 또한 그처럼 지켜보게 한다. 

 

문학용어를 빌리자면, 오민정의 지켜보는 일은 전지적 작가(Omniscient POV)가 아닌 관찰자 작가(Person POV)의 시선이다. 자신이 세계를 만들어내고 또 그 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지적 작가와 달리, 관찰자 작가는 몹시 조그만 존재이다. 모든 것을 아는 신이 아니라 하나의 개인에 불과하기에, 그의 시선은 다분히 제한적이며 필연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타고난 운명처럼 말이다. 

 

세계를 속속들이 아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작가들이 관찰자라는 제한된 위치로 스스로를 세워놓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 이후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고, 누구도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가는 제한되고 왜곡된 시선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해석했고, 지켜볼 것을 만들었다. 보는 일은 하나의 담론이 되었고, 우리는 『on looking』이나 『way of seeing』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카메라는 그것을 통해 지켜보는 자와 그 결과물을 보는 자의 시선을 동일시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지켜보는 일’이라는 이번 전시에서 오민정의 영상을 보며, 우리는 그가 지켜본 것을 다시 지켜보게 된다. 완벽한 1인칭의 관찰자 시점을 통해 우리의 시선은 오민정의 시선과 동일시되어 그가 본 풍경들을 마치 우리가 본 것처럼 바라본다.  

 

오민정이 지켜본 것은 사소하고 작은 풍경들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쓸고, 버려지는 종이박스를 쌓고, 방울져 내려오는 물방울을 담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관람객 역시 따라가게 된다. 그러한 풍경들을 보며 도시를 떠도는 오민정의 행위는 여행이라 부르기에는 합당하지 못하다. 그는 그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지켜볼 뿐이다. 여행자가 낯섦과 새로움을 발견한다면, 스스로를 ‘관람자’라고 부르는 오민정은 도시-세계를 떠돌며 지켜본다. 

 

오민정이 지켜보는 풍경들은 낡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피치 못할 쇠락함을 찾아내고 익숙한 것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순간을 발견한 오민정은 그것을 어떻게 건드릴 것인지 고민하고, ‘지켜보는 일’을 택한다. 그는 자신이 본 세계를 다른 세계로 탈바꿈하는 환상에 관심이 없다. 더 나은 풍경을 찾아 다른 세계로 떠나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며, 낡아가는 것들에 대해 담담한 애잔함을 보낼 뿐이다. 

조금씩 낡아가는 오민정의 풍경들은, 그러나 소멸을 예고하지는 않는다. 그가 지켜본 풍경들은 그 무엇도 종료되지 않았고, 종료를 암시하지도 않는다. 그의 영상 속에서 보여지는 낙엽을 쓸어 담는 일, 종이박스를 쌓는 일, 물을 담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은 분명하다. 

 

낡음이란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것, 전부터 있어왔음을 의미한다. 오민정이 지켜보는 풍경들의 노후함은 그것들이 세계의 구성요소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가 그만큼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음을 말한다. 그런 사소한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는 지속되어 왔고, 동시에 조금씩 쇠락하고 있었다. 오민정이 지켜보는 것은 그러한 풍경들이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오래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글. 박성진(AL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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